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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문명의 전파 : B.C.1700년까지의 1차적 양상

 

기우너전 4000년과 기원전 1700년 사이에는 두 군데의 중심에서 일기 시작한 파문이 전세계의 인간사회로 확산되었다. 지리적 사회적 여건이 달랐기에 그 양상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파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계속 새로운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유목문화

초창기에 화전농법이 확립되어 갔을 때 화전농법에 적합하지 않은 유라시아 지역의 거대한 스텝지역에서는 고된 노동이 따르는 곡물재배를 거부하고 자신의 지리적 환경에 효과적인 광활한 초원을 이용해서 가축의 무리를 사육했다. 이렇게 해서 농경을 이해하면서도 경멸하는 독특한 유목민의 생활양식이 출현하게 되었다. 유목민은 수렵민과 마찬가지로 초식동물에 의존했고 한곳에 정주하지 않는 생활을 영위했다. 초기 농경민 사회는 평화롭고 평등적이었지만 유목민들은 대형동물을 사냥해야하는 수렵민 특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차이로 유목민은 농경민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유목민은 농경민을 지배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쟁기

쟁기는 초기 농경 및 인간생활 구조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농경민은 쟁기 덕분에 한곳에 완전히 정착할 수 있었다. 더이상 화전식 농법에 적합한 삼림지대를 찾아 헤메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쟁기질을 통해서 곡식이 더욱 잘 자라는 토양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로인해 쟁기를 이용한 농경민들은 화전민보다 상당한 양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이집트 문명

문명화된 형태의 사회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관개가 가능했떤 강유역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환경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메르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 있떤 여러 작은 하천은 그런 조건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이들 강의 계곡은 너무 협소해서 다른 고대문명에 필적할 만한 거대한 사회의 요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수메르 문명은 이집트 문명 발달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집트인은 수메르 모델을 단순히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집트의 실정에 맞게 모든 것을 뜯어고쳤다. 이로인해 이집트의 고급문화는 모든 면에서 독자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고왕국 (약 2600~2200 B.C.)

독립된 두 왕가에 의해 각각 통치되고 있던 상,하 이집트를 메네스 왕이 통일하면서 마침내 단일정권이 성립되었다. 이후 파라오의 궁정은 압도적인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집트는 수메르가 도저히 이룩할 수 없었떤 대내적 평화와 질서를 해결했다. 중앙에 모든 것을 집중하면서 오늘날 대기업이 누리는 이점을 얻었으나 고왕국의 전성기에도 지방간의 격차는 존재했다. 그로인해 중앙집권적인 이집트 정부를 궁극적으로 붕괴시킨 것은 지방관리의 반역이었다. 이후 이집트 문명의 많은 분야는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중왕국

이집트는 기원전 2000년경에 새로운 정복자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중왕국은 약 200년 동안 존속했으며 중왕국의 지배자들은 고왕국 파라오들의 업적을 계승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이집트 사회와 문명이 중앙에 의존하는 정도는 차츰 낮아졌다. 

 

인더스 문명

기원전 3000년과 기원전 2000년 사이에 인더스 유역에서 출현한 인더스 문명에는 두 개의 거대한 중심도시가 있었는데 하나는 하라파에, 다른 하나는 모헨조다로에 있었다. 이 두도시는 이집트 고왕국 때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 역시 수메르와 접촉한 것이 틀림없으며 그러한 수메르 문명 위에 자신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문명은 아리아어를 사용하던 북방의 부족이 침략했을 때 사라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2500~1700 B.C

관개수로를 갖춘 평원의 부를 약탈하려는 야만족을 물리치기 위해 변경의 방비를 가오하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해결 되지않았기에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생활 역시 평화롭고 태평하지만은 않았다. 끝없는 정치적, 군사적 소요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는 두가지 변화가 있었다. 먼저는 수메르어가 더 이상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되지 않고 제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광대한 영토를 거느린 제국으로서 통일성과 안정성을 달성해 가는 과정에서 관료제, 법, 시장의 발달했다는 것이다. 수메르에서 아카드로, 그리고 아카드에서 바빌로니아로 지리적 중심이 바뀌고 부와 권력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언어적 변용이 일어났으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본적인 연속성에는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천수지대로의 이행

메소포타미아 같은 복합사회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을 갖춘 하천유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문명사회는 바다에 둘러싸인 형태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천수지대가 문명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 후에야 비로소 문명이 지상을 뒤덮을 수 있었다. 천수지대에서 문명이 개화하는 필수적인 조건은 농민들이 잉여식량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고, 잉여식량을 다방면의 전문가에게 이양할 사회기구가 나타나야만 한다. 

 

해양문명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화는 초기 해양문명을 조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예이다. 미노아 문명의 영광을 창조한 직인이나 다른 전무낙들을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부는 주로 해양무역을 통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크레타 문명의 절정기에 지중해 서단에 위치한 몰타 섬에는 또 다른 고급문화의 중심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섬은 거석 종요의 본산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과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거석유물의 지리적 분포상태를 보면 이 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해로를 통해 이동했고 꽤나 숙련된 항해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동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기원전 3000년과 기원전 1700년 사이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인간의 생활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한 편이다. 중국 문명이 개화하고 있던 황허 중류지역에는 조를 주식으로 하는 농경민 집단이 밀집해 있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동남아시아의 큰 강 유역에서는 전혀 다른 유형의 원경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지역 특유의 몬순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들 공동체에서는 항해술이 발달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등의 문명의 발달이 있었지만 서 아시아의 복잡다기한 문화에 견줄 만한 문명은 출현하지 못했다. 이 역시 몬순지대의 기후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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