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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매
처음 기독교 신자들은 1세기 유대인들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였다. 그 후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는데 먼저는 다른 유대인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로마 제국의 안과 국경을 넘어 다른 국가로 전해졌다. 따라서 처음 몇 세기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발전한 세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p21)
팔레스틴의 유대교
팔레스틴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고난과 투쟁을 경험했다. 옛날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소아시아와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주요 통상로의 교차점이라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성경에도 나와 있는데 팔레스틴 지역의 주변에 흥왕 하던 대제국들은 모두 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거느린 마케도니아 군대가 새로운 세력으로 이곳에 출현하고 정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사업은 헬레니즘 문화로 통일시키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된 지역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 헬레니즘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헬레니즘에 대해 극심하게 반대하던 마카비 일가의 투쟁이 있었지만 이러한 헬레니즘으로 인해 형성된 통일성은 로마의 정복, 그리고 복음의 전파를 위한 길을 열게 되었다. (p21)
일반적으로 피정복민에 대한 로마의 정책들은 온건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유일신에 대한 신앙만을 고집하고 이에 대한 미세한 위협에도 지나치게 반발하는 유대인들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로마는 유대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거의 계속적으로 반란을 시도했다. 이러한 고난들 속에서 유대교는 서로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고, 몇 가지 당파들이 출현하였다.
- 바리새파 -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 율법주의적 색채가 강함. 부활과 천사를 믿음.
- 사두개파 - 유대귀족층, 로마 후원으로 유지되는 성전에 관심. 친로마 반바리새파.
- 에세네파 - 금욕주의. 종말에 대한 강렬한 기대. 일반 사회와 격리되어 율법에 순종하기를 추구.
이렇듯 다양한 분파가 생기기는 했지만 사두개파의 신앙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A.D. 70년 성전이 파괴되자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반면 성전 파괴 후에도 계속 생존할 수 있는 요소를 가장 잘 갖추고 있었던 바리새파는 현대 유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꽃피었다. (p26)
디아스포라 유대교
예수님의 탄생 몇 세기 전부터 팔레스틴을 떠나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였다. 이처럼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기들 선조의 조국과 강한 감정적, 종교적 유대감을 간직하였는데 이들이 곧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고민 중 하나는 이들 중에서 많은 숫자가 선조의 언어를 망각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히브리어 경전을 이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알렉산더 정복 후 지중해 연안에서는 헬라어가 통용되었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경전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해진 이 번역은 셉투아진트 혹은 70인역이라고 불리운다. 이러한 명칭에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이러한 전설이 생긴 이유는 아마도 이 번역본이 신적인 영감을 받았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완성된 70인역은 초대 교회에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신약의 저자들이 이 책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p27)
그레꼬-로마 세계
로마 제국은 지중해 연안에 일찌기 볼 수 없었던 통일성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로마 제국을 통해 이룩한 정치적 통일 때문에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산적들이나 지역 분쟁의 위험 없이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통일성은 초대 기독교 신자들에게 위협이 되었는데 제국이 보다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 종교를 혼합하는 종교적 혼합 정책과 황제 숭배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로마 정부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각 지역의 신들은 결국 동일한 존재라고 가르치며 만신전에 수많은 신들을 계속 첨가하기 시작했다. 로마가 만들어놓은 교통망을 통해서 다양한 신앙와 전통, 문화가 섞이게 되었으므로 당시는 혼합절충주의가 유행이었다. 이러한 종교는 지금의 신비 종교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기독교 박해의 이유가 된 것은 이러한 혼합 종교 정책이 아니라 로마 종교의 다른 요소인 황제 숭배였다. 로마 정부는 황제의 상 앞에 향불을 밝히는 것을 통일과 충성의 방법 및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간증으로서 황제 앞에 향불 밝히기를 거부하였기에 로마 정부는 이들을 불충하고 반역적 인간들로 몰아붙였다.
동시에 헬라 문화 안에서 기독교는 철학적 전통을 통해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변증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불변하는 지존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영원한 진리의 고상한 세계에 대한 가르침에 기독교인들은 매력을 느끼고 그 이론들을 사용했다. 스토아주의와도 비슷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기독교가 등장할 무렵 스토아주의자들은 철학의 목적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적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당시의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던 입장에 기독교 신자들은 매력을 느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생활이야말로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생활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수많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당시의 신들에 대해 사용하였던 비판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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