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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에 매우 강력한 교회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곳의 기독교 공동체의 후기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다. 신약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러 작가에 의해 쓰여진 신약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기독교 최초의 공동체의 생활에 관해 그런대로 명확한 모습을 추측 할 수 있다.
통일성과 다양성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흔히 이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여러 집단들 사이에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아닌 유대인 내부의 갈등 이었는데 보수적인 유대인들과 개방적이었던 유대인들 사이의 대결이었다. 사도행전에서는 전자를 히브리파, 후자를 헬라파 라고 부르고 있다. 사도행전에 일곱 집사들은 전부 헬라파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반헬라파 유대인으로 구성된 유대 공회에 의해 일곱 집사 중 한명이었던 스데반이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태형을 받거나 설교를 금지 당했던 베드로나 요한의 처분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후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에 갔을 때도 예루살렘에 사도들이 남아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최초의 박해는 주로 헬라파 기독교인들을 향한 것이었으며 히브리파는 이들만큼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박해로 인해서 헬라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방 세계를 향한 다리를 놓았으며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했다.
종교생활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종교의 추종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의 생각은 유대교의 부정이 아니고 유대교에서 바라던 메시아의 시대의 도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계속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에 참석했다.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던 주일의 첫날을 첨가하였다. 초대 교회 성찬식의 초점은 예수의 고난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에 있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들의 권한이 막강했지만 사도들 외에도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같은 지도자도 있었다.
유대 교회의 쇠퇴
헤롯대왕의 손자였던 헤롯 아그립바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살해하는 등 유대 교회의 박해는 심해졌다.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자 기독교 공동체는 요단강 건너편의 펠라로 옮겨 갔는데 이러한 이동은 단순히 박해 뿐 아니라 로마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당시 로마가 유대인들의 극심한 민족주의로 인한 반란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마의 의심은 계속 되었고 예수의 다른 형제 시몬은 결국 로마인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 교회는 고립되고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했으며 5세기경에는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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